다아트 김금영 기자 2025.05.21 17:38:27
갤러리퍼플이 강주리 개인전 ‘분더카머: 호기심의 방(Wunderkammer: Wonder-Rooms)’을 연다.
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분더카머’는 진귀한 물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던 공간이었다. ‘컬렉션의 역사’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분더카머는 ‘조각과 회화 같은 예술 작품’, ‘국내외의 이국적인 오브제’, 그리고 ‘동물의 뿔이나 발톱, 깃털처럼 특이하고 이질적인 자연물’이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됐다.
귀족들에게는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지만, 인문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던 학자나 예술가들에게는 자연과 예술에 대한 탐구의 장이 됐다. 이처럼 분더카머는 수집자의 미적 감각과 지적 호기심, 사회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이자, 보는 이에게는 경이와 사유, 그리고 상상의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다.
강주리는 생태 환경의 변화, 생명체의 진화와 변이,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를 유영하며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독자적인 시선을 구축해왔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분더카머에서 영감을 받아, 작가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배열한 뒤, 이를 다시 엮어내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가시화한다. 드로잉을 통해 오랜 시간 축적한 사고의 편린과 상상의 파편들을 모아 작가만의 ‘호기심의 방’, 곧 하나의 분더카머로 재구성된다.
드로잉은 작가에게 상상을 탐구하고 소유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펜과 잉크를 주재료로 한 그의 드로잉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의 단면과 그 이면에 잠재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적 반응에서 출발한다.
작업은 철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하지만, 드로잉은 계획보다 감각과 직관에 의지해 전개된다. 머릿속의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는, 즉흥적인 드로잉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이로써 상상은 형체를 얻고, 사유는 선과 면으로 시각화된다.
작업은 평면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매체와 표현 방식으로 확장된다. 특히 ‘삶의 바퀴(Wheel of Life)’ 시리즈는 조트롭(Zoetrope)과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와 같은 초기 애니메이션 장치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정적인 드로잉에 시간성과 움직임을 부여한다.
이러한 장치적 전환은 드로잉을 고정된 형상에서 해방시키고,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리듬 속에서 재구성되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작가의 수행적인 행위는 관람자의 시지각적 참여를 유도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환영적 경험을 제공한다.
강주리는 작가노트를 통해 “지난해 개인전 ‘항해하는 돌’에서 지난 3년간 한국,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경험한 신화적 풍경을 배경으로 무생물인 돌이 살아있다고 믿게 되는 경험, 상상과 믿음,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며 “전설과 신화가 바탕이 되고, 문명 속 자연과 전설 속 등장하거나 멸종됐거나 또는 존재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마주친 적 없는 동식물이 뒤섞인 소우주는 초월적 힘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해 질문했다”고 했다.
이어 “현재, 나는 무엇을 그리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는 행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가상의 사유와 소유에 대해 고민한다. 드로잉은 실재의 존재에서 상상의 세계로 가는 첫걸음이다. 나의 머리속 추상적인 생각이 몸의 움직임을 통해 종이 위에 그려진다. 가상의 사유가, 즉 상상이 표출된다”며 “상상한다는 것은 또한, 나의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드로잉과 상상은 상호 순환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상상을 표출하는 드로잉을 그리는 것은 그 사유를 소유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고 했다.
갤러리퍼플은 “이번 전시는 수집과 관찰, 기록과 실험이 축적된 한 개인의 지적 우주이자, 상상과 사유의 흔적들이 얽혀 구성된 시각적 아카이브”라며 “관람자는 이 호기심의 방을 거닐며, 강주리의 내면적 세계를 따라가는 동시에 자신만의 질문과 상상을 되짚는 사유의 여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갤러리퍼플에서 이달 30일부터 7월 12일까지.
한편 작가 강주리(b. 1982, 수원)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시각예술가다. 미국 Tufts대학교 보스턴뮤지엄스쿨, 덕성여자대학교를 졸업했고, 미국 매사추세츠 문화부 아티스트상 수상, 영국 글렌피딕 AiR 한국대표로 선정됐다.
미국 쿠에스타대학교 Harold J. Miossi아트갤러리(2023), 수림문화재단 김희수아트센터(2021), 경기도미술관(2018), 주스페인한국문화원(2018) 펜실베니아공과대학교갤러리(2015), 뉴햄프셔대학교미술관(2014) 개인전 및 서울대학교미술관(2021), 서울시립미술관 SeMA창고(2020), 창원조각비엔날레(2020), 수원시립미술관(2018), 미국 피츠버그아트뮤지엄(2018), 대만 타이페이시립미술관(2017)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경기문화재단, 페이스북코리아, 글렌피딕-윌리엄그랜트앤선즈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고,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삼성 더프레임TV, 현대문학, 홍콩 미라마쇼핑센터 등과 협업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글렌피딕(2023), 경기창작센터(2018),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17), 미국 윌라파 베이(2015), 중국 Inside-Out아트뮤지엄(2014)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며 작업을 선보여 왔다. 현재 갤러리퍼플 스튜디오(galleryPURPLE STUDIO)에서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